그냥 얼음과는 뭐가 다를까? 젤 아이스팩의 “아하!” 원리 완전 정복
사이언스 트레이너 쿠와코 켄입니다. 매일매일이 과학 실험!
무더운 여름날, 도시락이 상하지 않도록 하거나, 음료를 꽁꽁 차갑게 식혀 두거나, 한여름 드라이브 중에 신선식품을 운반할 때.

우리 생활 곳곳에서 든든하게 활약하는 것이 바로 ‘보냉제’입니다. 그중에서도 말랑말랑한 느낌의 ‘겔 타입’ 보냉제는 그냥 얼음보다 훨씬 오래 차가움을 유지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꽤 신기합니다. 딱딱한 얼음이 아니라 굳이 저런 겔 형태로 만들어 놓은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저 작은 봉지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겔 타입 보냉제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겔 형태’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인지 하나씩 파헤쳐 보겠습니다.
참고로 순간 냉각제는 전혀 다른 원리를 이용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고해 주세요.
저 작은 보냉제가 오랫동안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녹는 순간에 숨어 있는 ‘잠열’의 힘
겔 타입 보냉제의 내용물은 사실 대부분이 물입니다. 여기에 종이기저귀 등에 사용되는 ‘고흡수성 폴리머’를 조금 첨가합니다. 냉동실에 넣으면 이 물이 얼음으로 변하게 되죠.
재미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입니다. 보냉제를 사용할 때 얼어 있던 물은 천천히 녹아 원래의 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고체에서 액체로’ 상태가 변하는 것을 과학에서는 ‘융해’라고 하는데, 얼음이 녹는 동안에는 주변에서 상당한 양의 열을 흡수합니다.
핵심은 얼음이 모두 녹을 때까지 흡수한 열의 대부분이 ‘얼음을 물로 바꾸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보냉제 자체의 온도는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0℃의 얼음이 0℃의 물로 변하는 동안 온도는 그대로인데도 열은 계속 흡수됩니다. 이때 사용되는 열을 ‘융해열’이라고 하며, 온도 변화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열이기 때문에 ‘잠열’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원리 덕분에 보냉제는 오랫동안 0℃ 부근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주변을 계속 차갑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름에 자주 먹는 팥빙수나 빙수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금방 전부 녹아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얼음이 조금씩 녹으면서 우리의 혀와 주변 공기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물은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보냉제의 주성분인 물에는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에서는 이를 ‘비열이 크다’고 표현합니다.
비열이 크다는 것은 어떤 물질의 온도를 1℃ 올리기 위해 많은 양의 열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로 생각해 볼까요? 여름철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면 ‘앗, 뜨거워!’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같은 햇빛을 받고 있는 바닷물은 모래만큼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물의 비열이 모래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금속 냄비와 뚝배기를 동시에 불에 올려놓았을 때 금속 냄비가 더 빨리 뜨거워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성질’ 덕분에 보냉제 속 얼음이 녹아 만들어진 차가운 물은 주변에서 열을 받아도 자신의 온도가 쉽게 올라가지 않습니다. 천천히 따뜻해지기 때문에 그만큼 차가운 상태가 오래 유지되는 것이죠. 물이라는 물질은 알고 보면 꽤 훌륭한 냉각재인 셈입니다.
겔의 구조가 열의 침투를 막아 준다
겔 타입 보냉제의 비밀은 ‘겔 형태’ 그 자체에도 있습니다. 물과 고흡수성 폴리머가 만들어 내는 이 구조가 열이 전달되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겔 상태에서는 내부의 액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대류’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욕조의 따뜻한 물을 휘저으면 전체가 고르게 따뜻해지는데, 이것은 따뜻한 부분이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부분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열이 골고루 섞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겔 상태의 물질은 걸쭉해서 내부의 물질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대류에 의한 열의 이동도 크게 줄어듭니다.
묽은 수프와 걸쭉한 전분 수프 중 어느 쪽이 더 천천히 식을지 생각해 보세요. 답은 걸쭉한 전분 수프입니다. 점도가 높아 대류가 쉽게 일어나지 않고, 표면에서 천천히 열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겔 타입 보냉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얼음이 녹더라도 차가운 물과 따뜻한 부분이 곧바로 섞이지 않기 때문에, 전체가 같은 온도가 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줍니다.
게다가 겔 자체도 열을 잘 전달하지 않는 성질, 즉 열전도율이 낮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속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넣으면 금세 뜨거워지지만, 나무 주걱은 그렇게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금속은 열전도율이 높고 나무는 낮기 때문입니다. 겔 물질 역시 열을 잘 전달하지 않는 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보냉제 내부의 차가운 열기가 바깥의 열에 의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물론 보냉제가 봉지나 용기에 싸여 있다는 사실 자체도 외부 공기와의 열 교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스박스나 스티로폼 상자와 함께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철벽 방어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원리가 서로 힘을 합쳐 겔 타입 보냉제는 오랫동안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랑말랑함이 냉각 효율을 높여 준다
겔 타입 보냉제의 대부분은 얼려도 딱딱한 얼음 덩어리가 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부드러움을 유지합니다. 특히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소프트 타입’은 고흡수성 폴리머에 글리세린 등 어는점을 낮추는 성분을 조금 첨가해 냉동실에서 꺼낸 직후에도 유연함이 남도록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부드러움 덕분에 도시락의 틈새나 울퉁불퉁한 물건에도 보냉제를 밀착시킬 수 있습니다. 접촉 면적이 넓어지면 그만큼 열이 효율적으로 보냉제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냉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용물이 단순히 물뿐이라면 얼었을 때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 대상과 보냉제 사이에 틈이 생기고, 냉각 효율도 떨어질 것입니다. 녹기 시작한 물이 봉지 한쪽으로 몰려버릴 수도 있겠죠. 겔 형태라면 녹더라도 내용물이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치지 않아 팩 전체가 고르게 냉각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입에 넣어도 괜찮을까?
보냉제에 사용되는 고흡수성 폴리머(SAP: Super Absorbent Polymer)는 종이기저귀나 생리대, 일회용 손난로 등에도 널리 사용되는 소재입니다. 기본적으로 인체에 직접 닿아도 큰 해가 없는, 안전성이 높은 물질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겔 타입 보냉제는 주성분이 물(약 99%)이고 폴리머는 극소량(약 1%)만 포함하는 단순한 구성으로 만들어져 있어 가정에서 식품과 함께 사용하기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다만 폴리머는 매우 강한 흡수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실수로 입에 넣거나 삼키지 않도록 주의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도시락을 더위로부터 지켜 주고, 사 온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막아 주는 등 눈에 띄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는 보냉제. 그 작은 봉지 안에는 ‘상변화에 따른 잠열’, ‘물의 큰 비열’, ‘대류와 열전도의 억제’라는 물리와 화학의 원리가 꽉 들어 있었습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제품 속에 숨어 있는 과학의 원리를 알고 나면, 늘 보던 일상도 조금은 더 재미있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이번 여름, 보냉제를 사용할 때 오늘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보냉제에게 살짝 고마운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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